WHERE IS KOREAN DESIGN?
중세 이후의 전근대적 구조의 공동체 사회가 근대적 국가로 발전되고, 민주적 국가라는 개념으로 성장하던 시기, 사회적 구조의 변화를 주도했던 산업화의 역할은 그 사회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절대적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산업화가 태동되던 근대화 초기의 일제에 의한 피식민주의적 근대관과, 광복 후에도 지속되었던 유입 문화에 의한 사대주의적 문화의식은, 전통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국가로의 성장 과정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자생적인 문화 생성과 사회적 정체성의 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현대 한국 사회의 디자인의 이해 및 그 정의에도 분명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할 것이다.
조선(당시 대한제국)의 근대화 시기를 국제적 정치관계에서 살펴 보았을때, 청일전쟁 이 후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인해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병을 시작으로 결국 본격적인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태생적으로 대한제국은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자주성을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한일합병 이전 조선을 근대적 국가로써 자주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민중에 의한 자의적 노력도 존재하였는데,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을 중심으로 시작된 전국적인 농민운동과, 1894년 김옥균등을 위시로한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이(1894년) 그것이었다.
만인의 평등함과 외세의 내정 간섭을 몰아내기 위해 농민들 스스로 봉기하며 발생된 동학농민운동과, 개혁당의 정파적 시도에 의한 갑신정변은 당시의 조선 사회, 대한제국을 근대적 민주화 사회로써 변화시켜보자 했던 민중에 의한 사회적 변혁의 흐름이었으며, 그 의의성은 한국 근대 사학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의 중도적 차등 개화의지에 대립했던, 고종과 민비의 권력 다툼은 결국 왕실 권력을 약화시키며, 일본의 조선 내 군사 주둔 및 권력 행사력을 인정하게끔 되어, 민중 계층과 사회 지배 계층에 의한 사회 구조적 개혁의 노력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무력진압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이러한 개혁의 실패는 더욱 드라마틱한 조선 사회의 자주적 근대화 실패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종합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당시 조선 사회의 자주적 근대화의 실패의 원인은, 청나라, 일본등 외세의 강력한 군사적 압박과 지배세력 즉 민비 (명성황후)와 고종 그리고 대원군 간의 정치적 권력 다툼으로 인한 실패한 외교적 처세, 또한 농민운동에 실패한 민중에게 사회 개혁의 정당성을 지지를 받지 못한 지식계층의 관념적 계몽운동으로 사회 응축적인 힘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당시 대한제국은 서구의 국가들처럼 근대성을 기초로한 사회 개혁과 경제 구조적, 문화적 성장에 자의적으로 도달하지도 못하였고, 수많은 예술 문화재와 국가 성장의 기반이 될 사회 직간접 자원들을 모두 수탈당해야 했던 피식민국가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개화기 조선 사회는 이러한 다층적인 내외부의 요인들로 인하여, 굴욕적인 일제의 식민주의 통치와 그들의 역사관을 통한 의존적이며, 비자존적인 형태로 근대적 이념, 즉 모더니즘 이라하는 산업시대의 이해, 이성주의적인 문화 성장의 흐름에 겨우 간접적으로 맞닿게 되었다. 특히나, 일제에 의한 물질적, 문화적 자원의 수탈과 대외적 전쟁 준비를 위한 사회 인프라 구축뿐만 아니라, 창씨개명, 한글어 금지와 같은 조선의 전통 문화 자체를 미개시하고, 그 근본적 정신성을 삭제하고자 시행했던 ‘문화말살 정책’은 한국이라는 국가적 문화 정체성의 거세작업이었다 할 것이며, 이것은 현대 한국사회가 전통 사회와의 문화적, 정서적, 기술적 단절이 되어버린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어째서 식민주의적 근대화를 거친 한국 사회가 자생적 문화를 성장시키지 못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중대한 대목이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피식민국가적 국가발전관은 과거 한국 전통 사회의 경험적 가치인 전통공예나 예술 등 자생적인 문화와 기술, 그 안에 담길 정신적 가치들이 현대성을 목적으로 재해석되어 자라날수 있는 토양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의미한다.
디자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의식적 행위의 영역은(고대 원시인들의 기구사용의 원리부터, 근대적 기능주의와 현대적인 의미의 사회 문화적 활동까지) 그것의 사회적 의미와 경제성, 행위의 합목적성등 기본적인 성격형성의 과정을 고려해보았을때, 문화적 행위의 주체라 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문화라는 거대한 담론 자체에 포함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즉, 사회, 정치, 역사적 특성에 의한 문화적 정체성은 그 사회의 근대적 개념의 디자인과 필연적인 연관관계에 얽혀있으며, 현대적 디자인의 정체성 발아를 위하여 그 사회의 문화적 성숙은 곧 필수적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국가의 시대적인 근대화, 산업화의 역사와 동일한 궤적 선상에 놓여있는 근대 디자인의 탄생 과정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 속의 디자인의 정체성에 통시적으로, 또한 문화적으로,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수많은 단계에서 걸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한국 사회 속 디자인 문화, 정체성 부재의 현상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1945년 한국은 세계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일제의 패망으로 독립을 이뤄냈슴에도 불구하고, 채 근대적 민주국가로써의 사회관과 건설적인 산업 정체성을 정립하기도전에, 1950년 다시한번 중대한 세계 이데올로기 대립의 전쟁에 휘말리리게 된다. 약 3년 간의 풍파와 같은 시대적 고난이었던, 6.25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이후, 뒤늦게나마 70년대 새마을운동과 같은 계몽적 사회운동을 시작으로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장을 거둔 한국 사회였지만, 여전히 근대적 사회로의 성장이라는 나름의 합목적성과 이성적 문화 성장의 근거가 부실했다. 동시에 현대의 한국 디자인계에서 대거 관찰되는, 과거 식민주의적 사관에 의해 진행되었던 편향적 산업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빈약한 디자인적 의미론과, 문화적 정체성의 해석의 노력이 부족한 것은 역시 이러한 역사적 인과관계로 의한 것으로, 현대 한국 디자인을 이해하는데 본질적인 한계에 직면 할 수 밖에 없다 할 것이다. 불행 중 다행히, 전 후 분단국가로 성장했던 한국은 급변한 시대적인 혼돈 속에 성장과 발전의 역동성을 그들 사회 속에서 스스로 발견하게되며, 기어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급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이 역동적 꿈틀거림을 안고 성장한 흐름의 줄기인 한강의 기적 속에는 빛과 영광만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달콤한듯한 경제적 성장의 열매 속에는 실로 무수한 상실과 희생이라는 어둠이 함께 공존하였다. 그리고, 자의적 디자인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힘들고 불편한 이 난제 풀이 역시 눈 앞의 달콤함을 위해 그 필요성을 의문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 속에 드리워진 빛과 어둠을 표현하고자한 이 작품은 옻칠과 황동이라는 한국전통 공예 소재의 조합으로 한강이라는 시대적, 사회적 상징성을 담아 근대사속 우리 사회 안에서 읽어버렸던 시대적인 '근대성'의 움직임과 그 과정속 놓쳐버린 우리 디자인의 '정체성'에 대한 줄기를 함의하기 위해 차용되었다.
metafaux studio / 메타포스튜디오